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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 박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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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항원 작성일2003.08.28 조회2,5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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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 박세일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제도가 공동선(共同善: common good)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가정책이 공익(公益: public interest)의 실현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공동선이라 무엇인가 혹은 공익이란 무엇인가 공동선과 공익은 엄밀히 이야기하면 다른 개념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자(공동선)가 후자(공익)보다 광의의 개념이다. 또한 학파에 따라서는 이익(공익)을 가치(공동선)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여하튼 이 글에서는 논의의 단순화를 위하여 양자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기로 한다.
라고 물으면 그 답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여러 가지 견해로 나뉠 수 있고 견해간의 대립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여하튼 공동선이란 무엇인가 공익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확실한 견해를 세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국가든 개인이든 공동선이나 공익의 개념에 대하여 확실한 자기견해를 세워 두지 아니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첫째는 기존의 국가제도(정치 경제 사회제도)가 과연 공익에 봉사하는지 그리고 기존의 국가정책이 공동선의 실현에 기여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판단기준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앞으로 기존의 국가제도를 어느 방향으로 개선하여 나갈지 또한 국가정책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 그 방향과 방법을 찾을 수 없다. 한마디로 공익이나 공동선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지 않으면 국가개혁과 국정개선의 방향과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

둘째는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주장이 공익 혹은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분명히 그러한 주장 속에는 실제로는 사익(private interest)을 위한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공익이나 공동선에 대한 확실한 개념정리가 없으면, [공익을 위장한 사익]과 [진정한 공익]을 구별할 수가 없다.

주장의 당부(當否)와 진위(眞僞)를 판단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결국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시대가 열린다. 목소리가 큰 사람들이 판을 지배하거나 가두시위를 잘하고 여론조작에 능한 사람들이 판을 독점하게 된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가치의 지배가 아니라 언어폭력 내지 시위폭력의 지배가 된다. 결국 민주주의는 실패한다.

요컨대 국가개혁과 국정개선의 방향을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서도 그리고 민주주의의 성공을 위하여서도 우리는 공동선이란 무엇이고 공익이라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공익과 공동선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는가 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동양과 서양에서의 공동선

동양에서는 공동선 내지 공익을 사익과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이해한다. 사익의 유혹을 극복하고, 삿된 마음(邪心)을 완전히 비운 다음, 천하의 이익만을 생각할 때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공공선이고 공익이다. 한마디로 [천하의 마음]을 가질 때 들어 나는 천하의 이익, 혹은 대의(大義)가 곧 공익이다.

그리하여 노자(老子)의 도덕경에서는 이천하 관천하(以天下 觀天下)하라고 하고 있다. [천하의 마음으로 천하를 보라] 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천하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백성의 마음]이다. 그리고 천하를 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백성의 마음으로 천하의 일을 생각하고 백성의 이익에서 천하의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동양의 공익관(公益觀)의 요체이다.

물론 이러한 사상의 밑바닥에는 예기(禮記)에서 나오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사상이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천하는 개인이나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사상이다. 환언하면 천하는 소수의 지배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만 백성을 위한 것이다라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이 전제가 된다.

여하튼 이와 같이 동양에서는 공익은 사익과는 별도로 존재하고 사익을 억제하고 천하의 일을 백성의 입장에서 백성의 마음으로 생각할 때(見利思義) 나타나는 것, 즉 만 백성의 이익이 되는 것이 바로 공익인 것이다.

서양에서는 공동선 내지 공익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이다. 이 다원주의는 공익을 사익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사익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자기주장을 전제로 이들 주장간의 조화와 타협을 공익으로 본다. 한마디로 주장되는 여러 사익들 간의 균형점(equilibrium)이 공익이다.

따라서 주장되지 않는 사익은 공익의 형성에 기여하지 못한다. 예컨대 노동자들은 조직이 상대적으로 쉬워서 그들의 이해관계가 공익결정에 잘 반영되나 소비자들이나 농민들은 조직이 어려워 이들의 이해관계는 공익결정에 잘 반영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가진다.

또한 크고 강하게 주장할수록 자신의 주장이 공익의 내용에 반영될 가능성이 증대한다. 따라서 여러 사익들이 공익형성에 보다 큰 영향력을 미치기 위하여 조직적 노력과 경쟁을 하게 된다.

정치적 후진국에서는 가두시위나 목소리가 크게 작용하고 정치적 선진국에서는 이익집단들에 의한 정부나 국회에 대한 조직적 로비가 크게 작용한다. 특징적인 것은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공동선 내지 공익은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조화와 타협의 결과에 따라 공익의 내용이 달라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공동선과 공익의 내용이 불안정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공화주의(共和主義: republicanism)이다. 공화주의는 공익을 사익들간의 단순한 타협과 조화로 보지 않는다. 사익과는 질(質)을 달리하는 한 차원 높은 것으로 이해한다. 이 점에서는 동양 사상과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공화주의는 동양사상과는 달리 사익을 거부하거나 부정하지는 않고 오히려 개명(開明)된 사익(enlightened self-interest)을 전제로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합리적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한 차원 높은 공익을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명된 이기심 혹은 개명된 사익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누구나 자기 이익(사익)에 관심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기이익의 추구를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그런데 각자의 자기 이익추구활동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활동을 하기 때문에 불가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러한 영향을 고려하여 자기행위의 수준을 조절하는 것을 개명된 이기심이라고 한다. 따라서 개명된 이기심은 나와 남과의 상호관계 내지 상호영향에 대한 자기 성찰과 필요한 경우 자기 억제의 덕(德)을 갖추는 경우가 된다.

개명되지 않은 사익들간의 조화와 타협을 도모하는가 아니면 개명된 사익들이 합리적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공익을 함께 찾아가는가에 따라 다원주의와 공화주의가 나뉜다.

그러나 공화주의에서도 다원주의에서와 같이 기본적으로 공익의 내용은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다원주의에서는 사익간의 단순한 타협과 조화를 통하여서이고 공화주의에서는 공익을 찾기 위한 진지한 토론을 통하여서 이지만 기본적으로 어느 경우든 공익은 만들어 가는 셈이다. 그 결과 공화주의에서도 국민들의 개명의 수준, 대화와 토론의 질적 수준에 따라 찾아낸 혹은 합의된 공익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요약하면 기본적으로 동양에서는 공익은 사익을 억제할 때 자연스럽게 들어 나는 것, [발견되는 것]이라면 서양에서의 공익은 사익을 전제로 만들어지는 것, [형성되는 것]이다라고 정리해 볼 수 있다.

공동선의 확정방법

동양에서의 공동선은 사욕을 억제하고 천하의 마음을 가질 때 즉 백성의 마음을 가질 때 저절로 들어 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공동선 내지 공익을 발견하는 주체는 누구이고 그 주체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을 통하여 공동선을 발견하는가?

한마디로 동양에서의 공익발견의 주체는 정치지도자와 학자들이고 이들은 끝임 없는 수기(修己)즉 자기수양을 통하여 사욕을 억제함으로서 공익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된 내용을 일상생활 속에서 솔선수범 함으로서, 즉 스스로 앞장서 공익에 일치하는 행동을 함으로서 국민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발견된 공동선의 실현을 통하여 백성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하여, 즉 안민(安民)하기 위하여, 공익의 입장에서 국가정책을 세우고 그 정책을 사심 없이 바르게 집행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다원주의이냐 아니면 공화주의이냐에 따라 공익을 확정하는 방법이 다르다. 다원주의의 경우에는 공익은 사익들간의 경쟁을 통한 조화와 타협 그리고 균형이 공익이라고 보기 때문에 공익을 확정하는 주 방식이 각자의 자기주장과 경쟁, 공동분모의 발견 그리고 적절한 사익간의 타협이다.

반면에 공화주의에서는 공익은 사익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의 것임으로 사익들간의 자기주장만을 통하여서는 확정될 수 없고 사회구성원들이 각자의 이기적 주장(자기 중심적 관점)을 억제하고 사회전체의 관점에서 공익이란 무엇인가를 함께 심사숙고하면서 서로의 진지한 의견교환과 합리적 토론을 통하여 확정하여 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에서는 다원주의의 자기주장의 과정이든 공화주의의 자기성찰과 합리적 토론의 과정이든 사회구성원 모두의 적극적 참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요약하면 앞에서 본 동양에서의 공동선의 발견과정에서는 사회 지도자들의 자기수양과 솔선수범이 가장 중요하고 국민 일반의 역할은 수동적인데 반하여 서양에서의 공동선의 확정과정에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적극적 참여(자기주장이든 자기성찰이든)가 가장 중요하게 된다.

한국에서의 방법: 2단계론

그러면 오늘날 한국에서는 공동선을 어떻게 확정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동양의 방법과 서양의 공화주의적 방법 이 두 가지의 방법의 종합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면 왜 서양의 다원주의는 한국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가?

우선 서양의 다원주의는 우리나라와 같이 법치주의(rule of law)의 전통이 대단히 약한 나라에서는 순기능(順機能)보다는 역기능(逆機能)이 크다 법치주의란 본래가 사회구성을 위해서는 정치지도자는 물론 국민 모두가 지켜야할 기본원칙과 규칙, 모두가 존중하여야 할 가치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법치의 전통이 약한 속에서 다원주의만이 도입되면 사회는 사회구성의 기본원칙과 가치를 외면되는 무한경쟁의 난장판이 되기 쉽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무한경쟁 내지 무한투쟁만을 결과하기 쉽다. 각자가 자기의 사익(사적 이해관계)을 공익으로 만들려고 자유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서(수단방범을 가리지 않고) 사생결단의 경쟁만을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는 사회의 기본가치와 기본원칙을 지키기보다는 조직된 다수에 아부하는 대중주의 혹은 인기영합주의(populism)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힘있는 부패한 소수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정경유착형 권위주의(authoritarian kleptocracy)로 빠지기 쉽다.

또한 그 어느 것도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항상 원칙없는 타협이 지배하는 소위 협상형 민주주의(bargaining democracy)가 되기 쉽다 하이에크(Friedrich A.. Hayek)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서 민주주의가 가치나 원칙의 지배(rule of principle)가 아니라 이익집단들 간의 협상, 담합에 의한 이익과 편의(便宜)의 지배(rule of expediency)가 되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그 어느 것도 물론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다원주의는 곤란하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익은 사익과 다르다는 출발점에 서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문화와 역사적 전통에 보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우리나라에서는 법치의 전통은 약했지만 그 대신 명분(名分)과 대의(大義)가 중요시되는 문화가 강했다. 그리고 명분과 대의는 항상 사적(私的)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공익과 사익은 다르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다음은 공익이 사익과 다르다고 할 때 공익을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가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익을 확정하는 과정을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 생각하는 좋을 것이다.

첫째 단계는 전문가들(학자 등의 이론전문가와 전문경영인 전문기술관료 등의 실무전문가)이 당해 문제와 관련하여 공동선이 무엇인지 아니면 공익이 과연 무엇인지를 조사 연구하여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단계이다.

예컨대 환경문제가 있다고 하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공익에 가장 이로운가, 공동선에 가장 잘 봉사하는 것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환경문제의 전문가들이 가장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해당사자들의 의견도 충분히 경청하여야 하지만 결국은 최종적으로는 객관적이고 이론적인 전문가적 판단을 존중하여야 한다.

둘째 단계에서는 이 전문가들의 판단과 정책제안을 앞에 놓고 국민다수가 참여하는 개명된 공론화(公論化: public deliberation) 과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개명된 공론화란 사회구성원 각자가 자신들의 사적 이익주장을 자제하고 개인의 입장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관점에서 판단하여 공익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공동선이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합리적 민주적으로 진술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상의 두 가지 과정을 통하여 공동선과 공익의 내용이 확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단계를 자세히 보면 첫 번째 단계는 동양적 방식에 가깝다. 과거 정치지도자나 학자들이 할 역할을 이제는 이론 및 실무전문가들이 하여야 하는 셈이다.

옛날에는 지도자들이 자기성찰과 수양을 통하여 사심을 버리고 천하의 일을 천하의 마음(백성의 마음)으로 관(觀)하여 공익의 내용을 찾았으나 오늘날에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이론적 내지 실무적(혹은 현장적) 전문성을 높이는 조사 연구를 통하여 무엇이 공익인지를 확정 제시해야 한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단순한 전문가(지식인)가 아니라 공동선을 발견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보고하는 사명을 가진 사회집단이라고 보아야 한다. 옛날 동양사회에서는 정치지도자나 학자들에게 사심과 사욕을 버리고 천하의 이익(백성의 이익)만을 생각하여야 한다는 고도의 도덕성과 헌신성이 요구되었는데 오늘날에 전문가 집단에도 동일한 수준의 도덕성(지적 정직성)과 헌신성이 요구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단계를 보면 공익을 찾는 개명적 공론화과정에의 국민들의 적극적 능동적 참여가 대단히 중요하다. 따라서 이는 서양의 공화주의적 접근방식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즉 국민 모두가 적극 참여하여 무엇이 공익인지 무엇이 공동선인지를 합리적 민주적 토론을 통하여 찾아가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공익과 공동선을 확정하는 바람직한 방식은 동양적 방식과 서양의 공화주의적 방식의 결합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두 가지 단계를 거치는데 첫째 단계에서 지식인의 전문성과 도덕성이 중요하다면 둘째 단계에서는 국민대중의 적극적 관심과 참여가 중요하다고 요약할 수 있다.

결국 이 두 가지 단계를 통하여 전문가와 국민들간의 공동학습(共同學習), 상호학습(相互學習)의 과정이 발생하고 이 학습과정을 통하여 우리사회에서는 공동선이란 무엇이고 공익이란 무엇인가를 확정하여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선 전문가와 지도자가 중요하다.

이들이 사심을 버리고 사적 이해관계를 떠나 전문성과 지적 정직성에 기초하여 공익이 무엇인지를 밝혀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제시된 공익론을 가지고 대대적인 국민토론과 이해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집단적 자기교육과정이고 집단적 자기수양(自己修養)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익을 찾아가는 과정자체가 실은 그대로 민주주의의 토착화 과정 그 자체이라고 볼 수 있다.

미래를 위한 제언(提言)

한국사회가 공동선(공익)을 찾는 것을 보다 용이(容易)하게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이 문제는 이미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발전을 앞당기는 문제 그리고 바람직한 국가개혁과 국정개선의 방향을 찾는 문제와 깊이 관련되는 문제이다. 민주주의도 바람직한 국가개혁의 방향도 모두 공동선 내지 공익이 판단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공동선을 찾는 일을 보다 용이하게 하려면 다음의 몇 가지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독립적 싱크 탱크의 설치

첫째는 독립적 싱크 탱크(independent think tank: 독립적 두뇌집단)를 키우는 것이다. 세계화 정보화가 진행되면서, 사회가 보다 복잡 다원화되면서 이제 국가제도와 정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전문적이 되고 있다.

과연 무엇이 진정한 공익인지 아니면 공익을 위장한 사익인지를 일반국민들이 정확히 판단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따라서 당해 분야의 전문가들이 객관적 조사와 전문적 연구를 통하여 공익여부를 판단하고 구별하여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에는 일부 국민들의 단기이익에 반하는 것 같이 보이나 멀리 보면 모든 국민들의 장기이익에 크게 기여하는 제도와 정책도 많이 있다. 이런 경우에도 전문가들이 나서서 이러한 사실을 국민들에게 올바르게 이해시켜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올바른 이해를 돕는 기구가 바로 독립적 싱크 탱크이다. 여기서 독립적이란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된 중립적 연구기관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독립적, 정치적으로 중립적, 그리고 학문적으로 전문적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가진 즉 지적 정직성과 지적 권위를 가진 연구소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현재 이러한 독립적 싱크 탱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KDI 같은 정부출연 연구소가 있으나 정부로부터의 독립성 내지 중립성에는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삼성연구소등의 기업출연 연구소 등도 있으나 여기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다. 출연기업의 이해관계로부터 크게 자유롭기 어렵다.

대학에 여러 연구소가 있으나 이들의 경우는 인적 물적 기초자원이 너무 열악하여 심층적 연구기능을 제대로 해 낼 수 없다. 결국 우리나라에는 미국의 Brookings 연구소와 같은 순수한 민간의 독립적 싱크탱크는 없는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독립된 싱크 탱크를 만드는 일은 대단히 시급한 국가적 시대적 과제이다. 국가정책을 연구하는 이러한 민간의 싱크탱크가 미국과 유럽에는 많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대기업가나 대 자산가들이 공익을 위하여 기부한 공익기금의 지원을 받아서 이러한 싱크탱크가 시작되고 운영되고 있다.

시민사회 토론문화의 활성화

둘째로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civil society)를 활성화하는 일이다. 특히 시민사회 속에 자기주장과 더불어 자기성찰의 토론 문화, 관용과 양보의 민주적 토론문화가 보다 활성화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우리나라의 시민사회는 자기의견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이를 상대에게 강요하려는 투쟁형 토론문화가 부분적이지만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물론 그동안의 권위주의적 시대가 남긴 유산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시민사회는 권위주의와의 긴장관계 속에서 성장 발전하여온 시민사회이기 때문에 자연히 투쟁형 문화를 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투쟁의 시대가 아니라 민주사회의 건설을 위한 공동협력의 시대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민사회에도 앞으로는 합리적 민주적 토론을 위한 즉 상대의 주장을 경청하는 관용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겸손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과 훈련 등이 보다 많이 요청된다하겠다.

싱크 탱크와 시민사회의 연대

끝으로 중요한 것은 전문가 중심의 독립적 싱크탱크 운동과 시민사회의 시민운동이 함께 연대하고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시민운동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올바른 문제제기를 하고 민주적 토론을 하고 합리적 자기주장을 하려면 독립적 싱크탱크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싱크 탱크의 전문적 식견, 정책자료와 심층연구의 지원이 있어야, 시민사회에서 하는 모든 정책토론이 올바른 내용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주장들이 공론(空論)이나 희론(戱論) 되기 쉽고, 푸로(전문가)가 아니라 아마추어가 설치는 중우사회(衆愚社會)로 전락하기 쉽다.

역으로 싱크 탱크 입장에서는 시민운동을 통하여 현장의 문제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연구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장성(relevance)과 구체성이 약하면 많은 연구가 공리공담(空理空談)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실학(實學)이 아니라 허학(虛學)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싱크탱크와 시민운동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보완하면서 공동선을 찾고 이의 실현에 함께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우리나라의 수준과 발전을 한 단계 높이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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